- 한국성결교회 역사인물16-이건 목사
- 운영자 2021.2.20 조회 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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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결교회 역사인물>
16. 이건 목사
이건(李鍵)목사는 1896년 10월 20일 함경남도 북청(北淸)에서 엄격한 유교 가문의 외아들로 출생했다. 그가 17,8세가 될 때에 기독교를 접하자마자 곧 복음을 깨닫게 되었고, 대쪽같이 곧고 바른 그의 성격을 바탕으로 그는 열심히 경건한 신앙행활과 교회생활을 하게 되었다.
1920년에 이 건은 청운의 꿈을 안고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明治] 대학 신학부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부모가 가장 싫어하는 신학을 공부하였기 때문에 일체의 학비와 생활비 보조를 받을 수 없었던 그는 피눈물나게 고학으로 공부하다 결국 친구 이원균의 권고로 1922년 귀국하여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하였다.
1925년 제4회생으로 졸업하고 부교역자 김제근과 함께 평양 상수리교회를 개척하여 신자가 100여명으로 늘어나 교회의 공간이 협소해지자, 1928년 미국 시카고에서 모금된 헌금으로 예배당을 신축하였다.
1931년에 이건은 경성성서학원의 교수로 초빙을 받아 후진을 양성하는 일에 전념하게 되었다. 이명직 목사의 두터운 신임을 받은 그는 교무과장 혹은 학생과장의 직책을 맡았으며, 일제가 강요한 신사참배(神社參拜)의 거부로 1934년에 교단이 해산되고 경성성서학원이 폐쇄될 때까지 후진양성에 힘썼다.
광복 후 이건 목사는 새로 개교한 경성신학교의 교장에 취임하여 혼란기의 교단 목회자의 양성에 노력하는 한편, 교단 기관지 "활천"의 주필도 겸직하여 교단 목사들의 자질 향상, 영적 지도에 힘을 쏟았다.
1950년 한국전쟁 때에 그는 박현명, 김유연 목사 등과 함께 피난을 가지 않고 신학교를 지키겠다고 남아 있다가, 같은 해 8월 23일 아침에 북한 정치보위부원 3명에게 붙들려 납북되었다. 납북된 이후의 그에 대한 소식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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